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문단 편집) === [[잃어버린 10년/일본|일제히 폭발한 돈거품]] === [include(틀:국내외 주요 금융 위기)] > 버블 당시에 일본 국민들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공무원도 몰랐고, 언론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정치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br]일본 국민 전체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 ---- > 니시무라 요시마사,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교수, 전직 [[일본 재무성|대장성]] 은행국장 ||[[파일:버블경제.png|width=100%]]|| || [[닛케이 225]]의 '''1970 ~ 2007년의 기록''' || 1990년과 1991년 수치에 주목해 보자. 2010년대 [[아베노믹스]]를 기점으로 엄청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2만 초반에서 움직였으며 중앙은행이 엔화를 찍어내고 그걸로 주식을 사서 억지로 유지하는 실정이다.[* 일본 엔화가 기축통화에 준하는 격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연준이 주가 부양을 위해 비슷한 일을 한다. 당연히 [[인플레이션|한국에서 하면 큰일난다.]]] 닛케이 지수는 1991년 버블 경제 붕괴 이후 29년만인 2020년 11월 11일에야 25,000을 넘었다. 그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19]] 백신 개발 진전에 따른 경제 활성화의 기대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다.[[https://www.yna.co.kr/view/AKR20201111135300073?input=1195m|#]] 1990년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지나치게 높은 값으로 거래가 끊기자 가격이 하락하고 매물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는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고 1990년대 후반에 [[닷컴 버블]]로 잠깐 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했다. 물가 역시 계속해서 디플레이션을 거듭하고 있다. [youtube(-D7GIBs8QAU)] 부동산 시장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구두개입과 토지구역 감시제도 마련 그리고 금리 인상[* 본래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인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했으나 부동산 시장의 과도한 거품으로 인해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버텼지만 1990년 [[3월]] 27일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대신이 발표한 '''대출 총량규제'''[* 실시 기간 : 1990.03.27 ~ 1991.12.20]로 고꾸라졌다. 대출 총량규제는 쉽게 말하면 총량규제 발표 시점부터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였다. 발표 시점부터 6개월간 전면 금지하고 이후에도 3년간 이전에 '''200%까지 막나가던 [[LTV]]를 감정평가액의 70%로 제한'''했다.[* 다만 규제의 기한이 지나고 불경기가 지속되자 다시 LTV를 올렸고 2021년 기준으로 90~110%까지 대출을 해 주고 있다.] 이러다보니 대출이 없으면 매매가 끊기는 부동산 시장의 특성상 매매는 없이 호가만 대폭락했다. 이때 정부의 대책에는 연착륙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부동산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돈만 버는 놈들은 그냥 망해도 싸다"'''는 생각을 지녔으며 류타로도 일본 전체 경제에 다소 영향이 있을 순 있으나 비정상적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내할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했고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예상보다 싱겁게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직장인들을 달래주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곧 엄청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고 나중에 아시아의 연쇄 IMF 사태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등의 경제위기에서 정부의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버블이 붕괴된 직후 투기업자들과 건설 업계들이 무너졌고 이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을 떠맡게 되는 여파로 부실화된 금융기관들의 연쇄도산도 이어졌다. 부실채권이 막대해져서 '''일본 정부에서도 환수를 위한 관련 기구를 설치할 정도였다.''' 그리고 도미노의 붕괴처럼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에 대출을 했던 일반인들까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으며 불황을 맞게 된 기업들은 임금삭감과 대량의 해고를 동반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 서민 대다수의 지갑문을 닫게 만들었고 소비도 당연히 얼어붙어 경제에 악순환이 가중되었다. 버블이 완전히 사라진 1992년부터 엔화 기준으로 [[경제성장률]]이 0.8%(1992), 0.2%(1993), 0.9%(1994), 2.7%(1995), 3.1%(1996)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나 싶더니... [[태국]]을 위시로 한 아시아의 [[1997년 외환 위기]]로 일본 기업의 동남아 및 한국 투자자산이 대거 파산하며 일본 기업도 다시 줄도산했고 1998년부터는 '''엔화 기준으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되었다. -1.1%(1998), -0.3%(1999), +2.8%(2000), 0.4%(2001), 0.1%(2002) 등. 이러다보니 일본에서 엔화 기준으로 완전히 경제성장률 통계를 바꾼 건 [[1998년]]부터다. 1997년까지만 달러 기준 성장률을 발표하다가 1998년부터 폐지했다. 일본인의 소득이 늘어나기는커녕 꾸준히 제자리걸음인데도 달러화 기준 GDP는 끝없이 성장하는 일본의 생활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버블 붕괴는 당시 [[일본/경제|일본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이로 인하여 이후로도 수십년간 엔화 기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당시를 '''[[잃어버린 10년/일본|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너스 성장은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력한 양적완화 드라이브를 통해서 다소 나아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 엄청난 후폭풍의 피해는 20년이 지나기까지 영향을 미쳐 2014년 기준으로 가처분 소득은 85년 수준 이하까지 떨어졌다. (자세한 것은 후술) 버블이 붕괴되면서 [[폐건물]]이 늘어났으며 시골이나 공터에 방치되는 [[자동차]]들도 늘어나게 되었고[*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수입차들이 한국, 중국, 동남아, 러시아, 인도 등지로 중고로 팔려나갔다. 현재도 구소련권에 가면 1980~90년대에 나온 우핸들 차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 시절에 팔려나간 차들이다.] 거리나 공원에는 [[홈리스]]가 속출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아이린 지구]]의 슬럼화가 진행되었다.] > 거품경제 당시에는 100만 엔 코트, 80만 엔 양복을 입고 다니고 예쁜 여자에게 모피코트를 입혀서 데리고 다니고 커다란 반지를 끼고 활보하던 분들이 지저분한 옷을 입고 술 취해 다니는 것을 보면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모치즈키 아케미, [[긴자]] [[호스트바|클럽]] 르 자르댕 [[포주|사장]] * [[울트라맨]]과 [[고질라]]의 미술감독이었던 스즈키 요시오는 '''총 12억 엔이라는 거금을 대출까지 해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버블 붕괴로 문자 그대로 쪽박을 차게 되고 빚독촉을 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로 인해 그의 아내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을 정도로 가정도 파탄났다. 〈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 를 촬영할 당시 스즈키의 집이 나오는데 아내가 머물고 있는 문을 찍기만 할 뿐 얼굴도 비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울증이 현재진행형임을 암시하고 있다.] * 자타공인 부동산 재벌 가수이자 3000억 엔의 부동산 자산가 센 마사오[* 별빛의 왈츠, 북국의 봄 등으로 유명했던 엔카 가수. 향토적인 외모와 양 눈썹 사이의 커다란 검은 사마귀(현재는 없음)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노래 또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곡이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센([[千]])' 마사오가 아니라 '억([[億]])' 마사오라고 불렀고 전용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업을 했고 그를 풍자한 개그 프로그램 등이 만들어질 정도였다.]는 '''1030억 엔의 빚을 지고'''[* 본래 3천억엔에 달했지만 현재 은행으로의 공적 자금 투입으로 인해 최종적인 개인 부채액은 1,034억엔이 되었다.] 파산한 것은 물론이고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전성기에는 '''일주일 동안 수억 엔 단위의''' 부동산 거래를 하던 그였지만 파산 이후 길거리에서 공연할 때는 '''밴드를 구성할 돈조차 없어서 녹음된 음반을 재생'''해야 했을 정도로 궁핍했다고 한다. 지금은 일본 연예계에서 완전히 잊혀진 상태. 그래도 센 마사오는 아래의 코지마 노부타카와 비슷하게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끝난 편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02년 민사재생법을 적용받아 6년간 1억 5,000만 엔만 상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그래도 한화 15억원이다. * 도쿄 시내에 빌딩 70채 소유에 8000억 엔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사업가 코지마 노부타카[* 바로 위 유튜브 동영상 썸네일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고 '쉿' 제스쳐를 하는 노인이다.]는 버블 붕괴로 인해 전 재산이 붕괴되고 100억 엔의 빚만 지게 되었다. 다만 상술한 파산해서 궁핍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다르게 빌딩 한두 채 정도는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듯.[* 그가 진 100억엔의 빚을 다 갚기까지 소요될 기간을 직접 계산해서 보여줬는데 무려 '''8333년이 걸릴 것이란 답이 나왔다!''' 한마디로 평생 못 갚는단 얘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